2012년 어느 날, 눈에 확 띄는 노란색 표지의 신기한 책을 발견했다. 데이비드 리스(David Rees)의 <연필 깎기의 정석(How To Sharpen Pencils) – 장인의 혼이 담긴 연필 깎기의 이론과 실제>. 나는 이 책의 표지가 너무 예뻐서 날림으로 책장을 넘기다가 어쩌다 보니 순식간에 완독을 해버렸다. 그리고 충격의 도가니에 빠져 버렸다. 연필이야 나도 수백 번 깎아 봤지만 이렇게 자세하고 치밀한 연필 깎기의 이론과 실제는 본 적이 없기 때문이었다. 혹시 누가 나보고 연필 깎는 법에 대해 써 보라고 하면 몇 줄 이상 쓰기 어려울 것이리라. 그런데 이 연필 깎기 장인은 무려 224쪽 분량의 양장본으로 출간한 것이다.

도대체 무슨 내용이었을까? 이 책은 연필 깎는 데 필요한 모든 것을 담았다. 다양한 종류의 칼과 기계식 그리고 수동식 연필 깎기의 소개, 흑연을 다듬는 데 필요한 사포, 예술 장인의 필수품 작업용 앞치마, 연필 밥을 담을 족집게, 후처리를 위한 칫솔과 수건 등의 준비물, 연필의 부위별 명칭과 연필 촉의 유형에 관한 정보, 본격적으로 연필을 깎기 전 준비 과정으로서 몸 푸는 방법은 물론 깎을 위치 선정, 첫 칼자국 내기, 나무 속살 깎기, 흑연 다듬기 등으로 이어지는 연필 깎기의 프로세스를 그림과 사진을 곁들여 가며 해부하였다. 이 정도이니 연필 깎기의 장인이라고 부를 수밖에 없다. 

요즘 사람들에게 아무런 관심을 일으키지 못하는 ‘연필’이라는 소재에 설혹 연필을 쓰더라도 스피드에 살고 죽는 지금, 누가 손으로 연필을 깎는 수고를 마다하겠냐마는 데이비드 리스는 그 부분을 집요하게 파고들었다. 그는 지금도 Artisanal Pencil Sharpening <http://www.artisanalpencilsharpening.com/> 이라는 사이트를 운영하는데, 그가 깎은 연필을 구입하려면 무려 100달러(미국 외 지역은 120달러)를 내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졸업, 입학, 취업, 기념일 선물로 수요가 상당하다고 한다. 별 거 없어 보이는 일에 자신만의 의미를 부여해서 성공한 사례다. 사소한 것에도 나만의 이론과 실제를 담으면 그것이 바로 비즈니스가 되는 것이다.

나의 전문 분야는 이렇게 찾는 것이다. 데이비드 리스의 사례는 불황의 시대에 어떻게 자립할 수 있는지 궁극적으로 보여준다. 한 가지 주제나 소재를 아주 구체적으로 파고들어야 한다. 연필은 누구나 깎을 수 있지만, 연필 깎기를 이 사람처럼 연구한 사람은 없었다. 그렇다고 그가 연구한 내용이 무슨 노벨 물리학상을 받을 정도의 난해한 수준은 아니다. 몇 년 정도 연필 깎는 것을 관찰하고 연구하면 누구나 충분히 얻을 수 있는 이론이다. 물론 몇 년 동안 실제로 연필을 수천 자루를 깎은 ‘실전’에 있다는 것은 더 중요하다. 몸으로 익힌 실전과 책으로 공부한 이론을 접목시키는 것이 포인트다. 

불황의 시대를 헤쳐 나가려면 나만의 전문성이 있어야 한다. 내가 정한 영역에서 한우물을 파야 한다. 오랜 시간 동안 연구하고 실습한 내용을 나만의 문체로 소화해 내야 한다. 그러니까 내가 정한 영역에 대해서는 적어도 책 한 권은 쓸 수 있어야 한다. 그것은 결코 어려운 일이 아니다. 연필 깎는 방법을 쓰는 게 어렵다면 도대체 무엇이 쉽다는 말인가? 다시 말하지만, 나의 전문 영역을 쪼개고, 또 쪼개서 아주 좁은 영역을 깊게 파야 한다. 데이비드 리스처럼 말이다. 좁은 영역에서 나만의 타이틀을 정하고, 나만의 키워드를 만든다. 세상에 없던 걸 창조할 필요는 없다. 그저 흔하고 사소한 것이지만 거기에 나만의 의미를 담으면 된다. 새로운 개념을 창조한다는 생각보다는 기존에 있던 것을 새롭게 바라보는 것이 중요하다. 좁은 영역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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